시카고 바이올린 제작학교 창립 40주년

설립자 이주호 교장, 제자들과 재상봉

시카고의 세계적인 ‘명물’인 바이올린 제작학교(Chicago School of Violin Making)가 창립 40주년을 맞아 성대한 기념식과 오픈 하우스, 학생들의 작품전시회, 와인 리셉션, 볼룸 만찬, 바이올린과 과학에 대한 기조연설 등 다채로운 행사를 펼쳤다.

지난 26일 에반스톤의 힐튼 올링턴 호텔에서 가진 모임은 시카고를 비롯, 전미주, 캐나다, 한국, 오지인 불가리아 소피아 등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이 학교 출신 바이올린 제작자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재상봉의 기쁨을 만끽 하고 성대하게 열렸다. 기자는 이 자리에 참석하고, 김우중 회장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바이올린 제작학교 이주호 설립자(교장)가 말한 “일의 성취는 노력과 인내의 산물이다”라는 말을 김우중 회장의 말에 덧 붙이고 싶은 심정을 느꼈다.

시카고 바이올린 제작학교는 유명한 바이올린 딜러인 케니스 워렌 엔드 선(Kenneth warren & son) 회사와 시카고 올드 타이머인 이주호씨가 동업으로 1975년 시카고 다운타운에 설립한 이 분야의 미국서 제일 오래되고 큰 학교이다. 1985년에 독립했으며, 초창기 다운타운에서 업타운을 거쳐 현재는 스코키(3636 Oakton)에 자리잡고 있다. 바이올린을 만드는 학교가 있는 곳은 미국, 독일, 영국, 이탈리아 등 4나라 뿐이며, 미국에서도 시카고를 비롯, 보스톤과 솔트레이크 시(유타주) 등 3곳 밖에 없는 희귀한 학교이다. 그리고 바이올린 제작에 관한 한 이주호 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장이다.

인고의 개척 정신으로 ‘거장’ 성취

이주호씨는 1932년 황해도 봉산 부농의 집에서 3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윤영씨는 동경에서 동양미술과 조각을 전공했고, 형님 이주천씨는 물리학 박사로 카이스트 초대 원장을 역임한 과학자다.

이씨는 서울 돈암국민학교 1회 졸업생으로 일본인만 다니던 명문 욱구중학교(경동고)에 입학했다. 6.25 전쟁 때 19살에 군대에 들어가 육군 교향악단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틈틈이 바이올린을 수리하고 만들기도 했다. 1958년 늦깎이로 홍익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제대 후 KBS 심포니에 멤버가 됐다. 그 때 피아니스트이며 KBS 심포니 임원식 단장의 비서로 일하던 박희옥씨와 1961년 결혼했다. 이씨는 독일 유학생 출신인 안용구 선생한테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의 영향을 받은 이 씨는 1964년 청운의 뜻을 품고 독일의 미텐발트라는 곳으로 유학을 갔다. ’연주’가 아니라 ‘제작’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대사관 장학금과 바이올린 판 돈으로 유학비를 마련했다. 이곳은 독일 남부 뮨헨 남쪽에 있는 오스트리아 접경지대의 알프스 산 속의 작은 분지 마을로 10시에 해가 뜨고 3시에 해가지는 곳이라고 한다. 물론 동양사람은 이씨 내외를 빼고는 한 사람도 없었으며, 가게에 나가 ‘기꼬만’ 간장 하나 살 수 없이 불편하고 외로운 산촌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칼 로이(Karl Roy), 이주호(Tschu-Ho Lee)와 같은 ‘거장’을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주호씨는 그 때를 회상하며, “우리 집 사람이 많이 힘들어 했다. 악기 공장에 취직이 되어 내가 공부에 열중할 수 있도록 힘껏 헌신했다”고 잠시 감회에 젖었다. 그는 68년 졸업할 때 독일 정부로 부터 ‘거장’(Meister) 자격 칭호와 함께 금메달을 수상했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학교에서는 ‘부지런한 학생’으로 이주호의 이름이 전설처럼 전해내려 오고 있다고 한다.

차이코프스키 심사위원으로 활약

2007년은 이주호 씨에게 드라마틱하고 꿈같은 해였다. 75회 생일을 음악회로 맞이 했다. 바이올리니스트 레이첼 바톤(Rachel Barton)이 수 백만 달러짜리 바이올린인 ‘과르니에리’(Guarnieri) 로 ‘해피 버스데이 송’을 연주했다.
시카고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그녀는 시카고 전철을 타다가 바이올린이 차문에 끼어 한 쪽 다리를 잃어 장안의 화제가 됐던 인물이다.

또 6월에는 꿈애도 생각지 못했던 ‘차이코프스키 음악 경연대회’(International Tchaikovsky Competition) 심사위원으로 뽑혔다. 더군다나 대회장인 첼리스트이자 지휘자이기도 한 므스티슬라브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로 부터 직접 초대장을 받았다. 심사위원이었던 일본인 ‘무라다소로쿠’가 은퇴하면서 인종을 초월해 이주호씨를 추천했다. 심사위원은 주최측 러시아를 비롯,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폴란드, 폴튜갈, 미국(이주호) 등 6명으로 최종 구성되었다. 이주호씨는 비록 미국시민권자지만, 국적 난에는 ‘코리안 아메리칸’이라고 기재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대회를 한 달 앞두고 80세를 일기로 급서했다. 그래서 이주호씨와의 상봉은 무산되었다. 로스트로포비치는 우리 시대 최고의 첼리스트이자 ‘행동하는 양심’을 지닌 예술가였다. 1968년 구소련의 체코슬라비아 침공에 반대하다 시베리아로 유배됐으며, 1970년 반체제작가인 노벨상 수상자 솔제니친을 옹호하고 은신처를 제공하는 바람에 정치적인 박해를 당했다. 그 후 1974년 연주여행을 떠났던 런던에서 망명, 미국에 건너와 20년 동안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미국에서 지냈다. 1990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복권된 후 그가 상임 지휘자로 있던 워싱턴 D.C. 내셔널 심포니 오키스트라를 이끌고 사랑하는 조국 붉은 광장에서 자유콘서트를 갖는 감동을 맛보았으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현지로 달려가 첼로를 연주한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장한나(사라 장)에게 첼로를 가르친 스승이기도 하다.

오직 한길 인격을 갖춘 장인의 길

이주호 씨는 희귀한 분야의 개척자이며, 선구자로 후배들에게 “인격을 갖춘 장인이 되라”고 당부 한다. 그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한국으로부터 광부와 간호사들이 많이 왔다. 그리고 동백림 사건이 터졌다. 독일의 윤이상 작곡가, 프랑스의 이응노 화백이 간첩혐의로 중정 요원들에 의해 한국으로 잡혀갔고, 시인 천상병도 고문을 당했다. 이씨가 살던 시골에 까지 쉽게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유혹’하는 친북 세력이 있었으나, 단호히 거절하고 오직 한길 공부만 열심히 했다. 그는 후배들에게 엉터리가 있을 수 없는 ‘독일 정신’을 강조한다. 정직하고 철저함이다. 구두 하나 만들더라도 장인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주호 씨는 2002년 은퇴를 했으나, 교장직을 갖고 있으며 지금도 바이올린을 만든다. 그가 만든 악기는 고가품이다. 정경화, 사라 장, 김영욱이 가지고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 ‘스트라디바리우스’ 처럼 더 비싸게 사야할 것이라고 귀뜸해 주었다.

부인 박희옥씨의 말이다. “5년-10년 주기로 학교 창립 기념행사를 갖는데, 50주년 기념행사에 80이 넘는 우리가 참가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기자가 말했다. “인간 수명 100세 시대다. 참가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못 참가 하더라도, 하늘 나라에서 기뻐할 것이다. 이주호 바이올린 학교는 10년이 가고 100년이 가도 뜻있는 후배들에 의해 오래 오래 이어갈 것이다. ‘이주호의 혼’은 인류 불멸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본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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