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과 5.18 민주화운동

나는 ‘4.19세대’ 다. 4.19세대는 현재 60대에서 70대에 이르렀다.
5.18 민주화운동 35주년을 맞아, 한인회, 호남향우회, 마당집이 주최한 기념식과 포럼에 참석, 4.19혁명에 대해 발제 강연을 했다.
오늘 칼럼은 포럼에서 발표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나는 내가 직접 참가한 4.19 혁명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4.19는 주체세력 없는 시민혁명
1960년 4월19일, 화요일, 성동역 근처에 위치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캠퍼스, 학생들은 그 전날 4.18 평화적 시위를 끝내고 귀가하는 고려대학생들을 습격해서 난타한 정치깡패 집단인 반공청년단의 만행에 분개하고 있었다. 당시 민주언론의 상징인 동아일보는 이 사실을 공정하게 보도했다.
아침에 학교에 갔는데 캠퍼스 분위기가 뒤숭숭 했다. 교정 앞에서 웅성대던 학생들은 누구의 지시도 없이 주동자도 없이 자연스럽게 대오(행렬)를 짜기 시작했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가방을 데모를 말리는 여학생들에게 맡겼다.

순식간에 행렬 선두는 교문 밖 큰 길로 밀려 나가기 시작했다. 강의실과 도서관에 있던 학생들도 낌새를 알아차리고 후미에 합류했다. 긴 행렬은 신설동, 동대문, 종로, 광화문을 지났다. “부정선거 다시 하자”, “민주역적 몰아내자”등의 구호를 외치며 평화적인 시위를 했다. 나는 데모대 밖으로 나가 “정치 깡패 때려잡자”는 다소 과격한 구호를 선창했다.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는 없었다. 연도의 시민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광화문을 지나 중앙청에 이르러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 뿐만 아니라 대광, 동성고등학교 학생들도 합류했다. 그리고 경무대(청와대)를 향해 돌진했다.
경찰 발포, 효자동
에서 104명 사망
중앙청과 경무대 사이에서 연좌시위를 하던 학생들과 경찰간의 일진일퇴가 거듭됐다. 경찰은 정오가 지난 오후 1시30분 쯤, 학생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곳 효자동에서 104명이 사망했다. 서울에서만 이날 약 200명이 사망하고 1,0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날은 슬픈 날이다. 정의와 민주주의를 외치던 젊은이들이 독재정권의 총알에 맞아 피를 흘린 가슴 아픈 날이다. 6.25 이후 10년 만에 또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른 슬픈 날이다. 나는 이날 효자동에서 자리를 피해 집에 잠깐 들른 후, 저녁에 서대문 이기붕 집으로 향했다. 트럭 위에 완장을 찬 젊은이들이 깃발을 흔들며 지나 다녔다. 자동차 위의 사람들을 향해 경찰이 총을 쏘았다. 총에 맞은 사람이 차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나는 동대문 친구 집까지 걸어갔다. 밤새도록 간헐적인 총소리를 들으며 들뜬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생에 가장 길었던 하루, 나는 시위의 주체이기도 했고 시위의 구경꾼이기도 했다. 내 일생에 가장 감동적인 4.19혁명은 나로 하여금 평생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심어준 금과옥조였다.

마산 김주열 시체 전국이 분노
단말마적인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 이기붕의 장기집권을 위해 천인공노할 ‘3.15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이에 항거하는 대구학생들의 시위, 2차례에 걸친 마산시위, 특히 마산 앞 바다에서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채 발견된 고등학생 김주열군의 시체는 전국을 분노로 들끓게 했다. 이것이 민중항쟁의 신호탄이 되어, 4.18 고대시위, 4.19 전국시위의 불을 붙였던 것이다.
그리고 4월25일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는 플랭카드를 들고 궐기한 대학교수들의 데모는, 급기야 26일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는 이승만의 항복을 받아내는 혁명의 절정을 이뤘다. 이 대통령은 부상자들이 입원해 있는 병원을 방문해 그들을 위로했다. 이 과정에서 군부는 중립을 지켰다. 군 마저 이승만을 떠난 것이다. 이 대통령은 5월29일, 몰래 서울을 탈출, 하와이로 망명길을 떠났다. 이와같이 이승만 정권은 뒤에 탄생한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에 비해 순진한 셈이었다.

민권쟁취로 배부르고 행복
당시 국민경제가 보릿고개에 시달리고 미국의 잉여 농산물에 의지하고 살 때 였지만, 국민들은 민권쟁취로 배가 불렀다. 그리고 모두가 희망을 안고 감동과 기쁨으로 들떠 있었다.
학자에 따라서는 4.19을 정치적 정변만을 부각시켜 ‘의거’라고 규정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학설은 4.19 밑바닥에 깔린 혁명정신(이념)인 원조경제에 대한 자립경제, 학생들의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구호가 상징하는 민족통일, 친일세력 제거 등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4.19는 포괄적 의미의 ‘혁명’으로 보는 것이 정설인 것 같다. 4.19혁명의 목표는 비록 5.16쿠데타 때문에 후퇴했으나, 4.19 정신은 살아서 부마항쟁, 한일회담 반대 6.3사태, 5.18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면면히 이어져,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시킨 6.29 항복선언을 받아내는 대한민국 민주발전에 밑거름이 되었다. 4.19와 5.18은 각 각 군사독재에 의해 목표가 좌절되기는 했으나, 민의를 배반한 절대권력은 절대부패하며 절대 망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남겼다.
다만 구체제는 타도됐으나, 근본적인 변혁이 이루어지 않았다는 점에서 4.19와 5.18은 현재 진행형인 ‘미완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직도 5.18 광주 민주화운동 공식 지정곡인 ‘임을 향한 행진 곡’ 조차 마음대로 부를 수 없는 조국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4.19와 5.18은 정의감에 불타는 용감한 젊은이들이 앞장 선 시민혁명이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절규였으며, “자유(인권과 민주주의)는 거져 얻어지지 않는다”는 교훈을 남겼다.
인류의 보펀적 가치인 자유 평등 박애를 외친 4.19가 전국민의 의거였듯이, 똑같은 가치를 부르짖었던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이제 호남 만의 것이 아니다. 5.18 민주화 운동은 유네스코 문화 기록유산에 등재될 만큼 세계역사에 찬연히 빛나는 우리의 긍지이며, 후손에 길이길이 물려주어야할 유산이다.

4.19 와 광주는 미완의 ‘현재 진행형’
4.19와 5.18에 뿌려진 귀한 선혈의 의미를 되새기면서 미완의 혁명을 진정한 혁명으로 꽃 피우기 위해서는 국민의식의 고양, 정치인의 대오각성, 언론의 민주화, 경제정의 실현이 요구된다. 우리가 지향하고 꿈꾸는 나라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콴유 같은 개발독재자들이 이끌던 ‘정권의 향수’도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 유럽의 민주 복지국가 처럼 개혁하고 전진하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국가 모습이다.
7,500만 국내외 한민족이 지녀야할 비죤은 도산 안창호 선생과 백범 김구선생이 제창한 정직한 민족, 문화민족이 되는 길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근세사를 뒤돌아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고, 거짓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경구를 뼛속 깊이 새겨야할 것이다.

본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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