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적 가치로 미화한 독재정권

지난 달 17일 가짜 싱가포르 정부 사이트에 속아 CNN 등이 그 나라의 ‘국부’인 리콴유가 죽었다는 오보를 낸지 1주일 만인 23일, 리콴유는 정말 사망했다. 향년 92세.
이 오보 소동은 그에 대한 국제적 관심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장기간 동안의 권력 유지와 지도자로서의 성공, 세계적인 명성에 천수까지 누렸으니, 그는 개인적인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일생 동안 4나라의 국가(영국, 일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를 부르며 산 리콴유는 1959년, 36세의 젊은 나이에 싱가포르 자치정부 총리로 부임했다.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퇴출되어, 싱가포르가 독립하자 초대 총리로 취임한 후, 1991년 총리 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32년 동안 싱가포르를 철권으로 통치했다. 그는 황페 하고 가난한 어촌인 싱가포르를 세계 수준의 금융과 물류의 허브 도시국가로 건설했다. 건국 초 1인 당 국민소득 500여 달러에서 현재 50,000여 달러를 기록, 아시아의 1위 세계의 8대 부자나라로 만들었다. 리콴유는 아시아의 마키아벨리라고 부를 정도로 목적을 위해서는 권모술수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가로 군림했다

리콴유 사망하자 박정희 부활
리콴유가 한국을 6번 방문한 것을 빼고는, 한국과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면에서 긴밀한 관련성도 없고 국제적으로 큰 영향력을 가진 나라도 아닌데, 박근혜 대통령은 직접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한국의 보수 언론들은 리콴유와 박정희의 연결고리를 찾아 대서 특필하는 행태를 보였다. 그와 박정희의 인연을 강조하면서, 리콴유는 평소 “박정희에게서 배워라” 라는 말을 했다는 언급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시대 개발독재자로서의 두 사람의 공통점을 부각시켰다. 아시아의 거인, 기념비적 지도자, 무에서 유를 창조한 나라, 라는 표현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대 대한민국이 리콴유를 더 추모할 수밖에 없는 이유” 라는 긴 제목의 조선일보의 사설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시대 대한민국에 ‘박정희’가 다시 필요하다는 소리 같기도 하고, 역사의 시계바늘을 되돌리자는 보수지 다운 편협한 주장 같아서 씁쓸한 생각도 든다. 또 다른 두 보수지는 이 때다 싶게 “리콴유는 포항제철보다 새마을 운동과 통일벼에 더 감명을 받았다”는 일화까지 소개하는 낯이 뜨거울 정도의 박정희 예찬을 했다. 아시아의 3대 인물이라며, 리콴유, 등소평, 박정희를 동일시하여 독재를 미화시키는 것은 미래 지향이 아닌 퇴행적인 사고의 발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싱가포르 보다 민주주의 선배
한국은 이미 50년대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3권이 분리되었으며, 대한민국의 국부라고 할 수 있는 이승만 정부가 부정선거로 민주주의를 일탈하자 순수한 젊은 학생들이 피로써 민주주의를 지킨 빛나는 역사를 가진 나라다. 좀 잘사는 나라라고, 리콴유가 국가관리형 자본주의에 성공했다고, 대한민국과 싱가포르를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한다는 것은 우리 자존심의 문제라는 것쯤은 한국 언론도 깨달았으면 좋겠다. 홍익인간, 화백제도, 화랑, 인내천 사상 등 유구한 아시아적 가치를 지닌 대한민국은 서구 민주주의 도입에도 앞장 섰다.
리콴유는 “사람들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봐라. 표현의 자유? 아니다. 집, 의료품, 직업, 학교다” 라고 말할 정도로 철저한 실용주의자다. 경제를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희생되어야 하며,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기본인권과 자유를 억압했다. 우리 주위에서도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느냐? 우리 한국 사람은 말로 안 된다. 박정희 같은 철권이 필요하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아시아적 가치’는 변명일 뿐
야당 국회의원이 없는 일당 독재, 정부와 국영기업체 요직은 친인척이 독점하고, 비판을 못 하게 언론을 탄압하고, 전제 왕정국가에서나 가능한 태형이 상존하는 나라에서, 리콴유의 정치 철학은 소위 ‘아시아적 가치’ 에서 나왔다. 민주주의와 인권, 그리고 자유는 서구의 산물이기 때문에 서구의 잣대로 아시아를 평가하지 말라는 주장이다. 아시아는 공동체적 질서 등 아시아만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리콴유는 1994년 ‘포린 어페어스’ 잡지 3-4월 호에서 서구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공동체 해체 현상, 도덕붕괴 현상 등을 지적하면서, “서구식 민주주의 제도는 아시아의 전통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기고를 해서 이에 대한 논쟁이 시작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비롯, 학자들의 찬반 토론이 몇 년 동안 뜨거웠다. 재야시절 DJ는 “민주주의를 특수한 서구 문화의 산물로서 규정하고 그 외의 통치사상이나 제도(독재)를 동양적 특수성의 산물로서 인식되도록 하는 프레임 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궤변이며 견강부회다”라고 통렬히 비판했다.
한 마디로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는 아시아라고 해서 결코 다르게 적용돼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싱가포르 모델’은 견강부회
리콴유의 ‘싱가포르 모델’, 박정희의 ‘한국식 민주주의’, 정치 후진국인 남미, 아프리카와 중동의 ‘선의의 민주주의’는 모두가 에릭 프럼(Elich Fromm)이 일찌기 갈파했듯이, ‘자유로부터 도피’(Escape from Freedom)를 하고 싶은 가짜 민주주의의 전형이다.

아시아적 가치의 논란을 촉발시킨 당사자는 원래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다. 그것은 정치 불안, 경제 낙후, 사회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고도의 국가동원 이데올로기 라는 것이다. 원래 아시아적 가치의 내용은 좋은 것이다. 개인보다 공동체, 가족에 대한 충성, 교육에 대한 몰입, 질서와 안정을 강조하는 것이 아시아적 가치다. 그런데 문제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이런 아시아적 가치와 왜 충돌을 해야 하느냐는 것과, 민주주의를 서양과 동양의 이분법적으로 구분해서 접근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이는 독재자들이 그들의 정치적 체제를 옹호하기 위한 논리로 볼 수 밖에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리콴유가 아시아적 가치를 강조하며 아무리 경제를 발전시켰다 해도, 독재자는 독재자다. 독재자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번영을 만들었으나,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뉴욕 타임스의 사설은 “정치 지도자의 업적은 경제적 성취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논평했다. 리콴유도, 박정희도, 그들의 뛰어난 경제적 업적으로 인해 20세기 한 시대 회자되던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이름 석자 앞에 ‘위대한’ 이란 형용사를 붙일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본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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