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 남아공의 큰별 넬슨 만델라


1999년 12월 31일, 20세기를 마지막 보내는 날, 나는 한 일간지의 편집장으로 연말 특집을 만들었다. 그중 20세기 인물과 20세기 사건을 추리고 추려서 편집한 화보 2페이지는 우리집 가보처럼 보전되어오고 있다. 나는 이 신문 원본을 액자에 넣어 우리 아들 방에 걸어 놓았다. 20세기 12명의 인물 가운데, 5명을 지면 상단에 배치한 작품이다.

1, 20세기 위대한 사회운동가이자 인도의 민족지도자로 영국 식민정책에 시종 비폭력 투쟁으로 민중을 이끌었다. 인도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큰 스승이 되었다. (마하트마 간디를 말한다.)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 이라는 뜻으로 시인 타고르가 송사한 이름이다.

2, 백인지배의 아파르트 헤이드(Apartheid인종차별) 정책에 맞서 싸우다 27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90년에 석방된 후 대통령이 됨. 이달에 별세한 (넬슨 만델라이다.)

3, 60년대 미국의 인권운동가, ‘나는 한 꿈을 가졌다’는 유명한 연설을 워싱턴에서 25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행함. 64년 노벨 평화상 수상. 68년 멤피스에서 피살(57세), (마틴 루터 킹 목사.)

4, 20세게 가장 위대한 생명 사상가, 의사로 아프리카의 병들고 가난한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생명 외경 사상으로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1952년 노벨상을 받았다. (알버트 슈바이처.)

5, 20세기 인류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 Person of the Century)로 타임 잡지가 선정했다. ‘상대성’ 이론을 창안한 그는 과학이 인류문화 향상에 공헌하도록 기여했다. 1879년 독일의 유태인 가정서 태어난 그는 과학자이면서 인본주의자였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이들 위대한 성인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박애주의자이며 평화주의자로 서로가 사상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아인슈타인도 대량 파괴의 원자탄을 막을 방법으로 간디의 비폭력을 제시했고, 만델라는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킹 목사를 존경하는 선배로 부르고, 자기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다 죽었다고 언급했다.

20세기 마지막 거성 넬슨 만델라가, 이달 5일 95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개인사를 접고 , 10일 영결식과 15일 장례식을 끝으로, 남아공 그의 어린 시절 들에서 뛰놀고 개울서 물고기 잡던 고향 시골마을(쿠누)에 영면했다.

세계의 메스컴이 대대적으로 보도한 바와 같이, 10일 그의 영결식은 세계 100여개 국가의 정상급 지도자들과 10만 명의 추모객들이 운집한 가운데 장엄하게 거행됐다. 미국에서는 전현직 대통령 4명이 부인들과 전세기를 함께 타고 가서 참석했다. 추도식은 한 위대한 인물의 업적을 기리는 축제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추모사는 한결같이 “용서와 화해로 인류를 하나로 결속시키고 세계를 변화시켰다”는 점을 강조했다. 15일 장례식은 아프리카 정상 10여명과 촬스 왕세자, 제시 잭슨 목사, 오프라 윈프리 등이 참석했다. 매장의식은 비공개로 친지만 참석했다.

지난 6월 위독설이 나돌면서부터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쾌유를 비는 위로와 격려, 추모 인파, 강처럼 긴 꽃다발의 행렬 등 만델라가 세계인의 관심과 사랑을 받은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만델라는1918년 움타타의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남아공은 영국의 식민지였고, 토지권이 박탈되고 착취와 억압이 심화될 때였다. 1949년 백인정권인 국민당은 아파르트헤이드라는 인종차별정책을 실시하면서 백인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흑인의 권리를 박탈했다. 이를테면, 거주의 자유도 없고 심지어 친구 배우자 직업까지 규제를 했다.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만델라는 흑인들의 권익을 위해 백인정권에 맞서 투쟁에 앞장섰다. ‘샤퍼빌 학살’ 사건 이후 한때 무장투쟁으로 전환 하기도 했다. 46세되던 해 국가 반역죄로 종신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1964년 4월 20일 만델라는 프리토리아 최고법정에서 “나는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는 유명한 최후 진술을 했다.

“나는 1번 피고인이다. 우리의 투쟁이 외국인이나 공산주의자들의 영향아래 있다는 정부의 발표는 일말의 근거도 없다. 우리는 법을 무시하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폭력에 의존 하지는 않았다. 아프리카인들은 여행할 권리와 외출할 권리를 갖기를 원한다. 특히 정치적 지평에서 모든 권리를 평등하게 누리기를 바란다”

만델라는 27년의 감옥생활을 끝내고 1990년 2월11일 73세의 나이로 출소했다. 말이 27년이지 인생의 3분의 1을 감옥에서 보낸 것이다. 이날 대규모 군중이 모인 케이프에서의 석방연설 역시 세계를 감동시킨 명연설로 기록된다.

“나는 백인지배에 대항해서 싸웠을 뿐만 아니라 흑인지배에 대항해서도 싸웠다. 나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이상을 소중히 간직한다. 이러한 사회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기회를 누리며 함께 산다. 필요하다면, 나는 이를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다”

만델라는 역사앞에 투사이며 혁명가였지만, 보통사람으로서 그는 겸손하고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를 가둔 교도관들을 감화시켰고, 그를 억압한 아파르트헤이드의 대통령과 가족을 직접 방문했다. 특별히 내일의 희망인 아이들을 무척 사랑했다고 한다. 1993년 만델라는 백인정권의 마지막 대통령인 데클레르크와 나란히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94년 4월27일 남아공 최초로 흑인이 투표에 참여한 역사적인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임기가 끝난 후 중임의 기회가 있었으나 그는 단임으로 끝내고, 민간인으로 돌아가 세계평화와 인권운동의 세계적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고령으로 별세했다.

아아! 타고난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 만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스승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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