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번 최초의 여시장

케네디 선거운동 정치 첫발
시카고 최초의 여시장 제인 번(Jane Byrne)이 14일 별세했다. 시카고 뿐만 아니라 세계 대도시 시장으로도 사상 첫번 째 여시장일 것이다. 미국서도 아직까지 그 기록을 깨지 못하고 있다. 그 자리가 그만큼 힘들다는 반증인지도 모른다. 제인 번은 1979년 부터 1983년 까지 제 50대 시장으로 재임했다. 여권신장 운동은 활발했으나, 성추행(Sexual Harassment)이나 동성애같은 말이 유행하지 않을 때였다. 그 때 그녀는 벌써 동성애를 찬성할만큼 진보적이었다. ‘싸움 닭’ 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강인하고, 아이리쉬 답게 다혈질이었던 여걸이 세상을 떠난 나이는 81세다.

그녀는 1960년 혜성처럼 나타난 존 F 케네디 대통령 선거 운동에 참여하면서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닉슨을 꺾고 케네디를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데는 시카고 민주당 머신의 당시 시카고 시장인 리차드 J 데일리 사단의 공이 무척 컸다. 제인 번은 선거가 끝난 후 논공행상을 받아 시청 소비자 커미셔너로 임명됐다. 당시 시청 장관(Cabinet) 급인 그 자리에 여성이 임명되는 것만도 파격적이었다고 한다.

폭설로 운좋게 시장에 당선
1979년 제인 번이 시장이 된 배경에는 리차드 J 데일리와 마이클 빌란딕이라는 인물이 있다. 한 시장은 그녀에게 정계 진출의 길을 터 주었고, 또 한 시장은 그녀를 시장선거에 뛰어들게 도발을 한 것이다.1976년 J 데일리가 심장마비로 급서하자, 그 뒤를 이어 빌란딕이 시장이 되었다. 그리고 제인 번은 빌란딕 시장에 의해 해고 당했다. 그후 1979년 제인 번은 빌란딕 시장과 맞서 민주당 시장에 출마한다. 경륜과 인기로 봐서 빌란딕의 승리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제인 번이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2년 만에 해고에 대한 단단한 앙갚음이다. 시카고는 민주당의 아성이기 때문에 공화당의 누가 나와도 예비선거의 승리는 곧 따논 당상 이기 때문이다.

이변이라기 보다 기적이다. 1979년 11월 선거를 몇 일 앞두고 시카고에 18인치의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다. 그런데 빌란딕 시장은 제설 작업을 잘 못했다. 눈에 쌓인 차들이 길에 갖혀 출퇴근을 못하고, 학교는 휴업하고 상가는 문을 열지 못했다. 불편을 겪은 시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이 원성이 표로 직결된 것이다. 예비선거 결과는 51-49로 제인번의 신승, 그 후 본선에서는 82%라는 사상 최고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Kathy 라는 딸 하나를 둔 47세의 금발 아이리쉬계 제인 번이라는 미국 대도시 첫 여성 시장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 녀의 남편 Jay Mcmullen은 30년 경력의 신문 기자로 데일리뉴스의 유명한 시청 출입기자였다. 이혼녀였던 제인 번과 선거 전 해인 1978년 세인 패트릭스데이에 결혼했다.

'머신'정치와 거리 둔 시장
한편 낙선한 빌란딕 시장은 그 후 그의 생업인 변호사로 돌아가 영예로운 삶을 누렸다. 1990년 고등법원 판사를 거쳐 일리노이주 대법원장으로 봉직하다 78세 때 사망했다. 그가 마지막 가는 날도 눈이 왔다고 한다. 빌란딕의 시장 직은 그에게 맞지않는 자리 (Unplanned Career switch) 였다는 것이 일반 여론이다. 시카고 트리뷴은 ‘판사, 시장, 신사 (Judge, Mayor, Gentleman)라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 그의 청렴 결백했던 품성과 신사도를 기렸다.
시장에 당선된 제인 번은 위대한 시장의 칭호는 받지 못했으나, 나름대로 열심히 싸우고 사회를 바꿔보려고 노력했던 정치가다. 당시 시카고 정치판은 머신(Machine)정치가 작동할 때인데, 제인 번은 거기에 가담하지 않았다. 재임 중 업적이라면 저소득층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한 점이다. 권총 소지 금지, 동성애자 차별 철폐, 시 예산 투명성 강화 등의 법을 만들었고, ‘테이스트 오브 시카고’ 음식축제를 시작하여 시민들을 즐기게했다. Cabrini Green 이라는 대낮에도 총소리가 요란한 우범지대 흑인 아파트에 들어가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그들과 함께 기거한 ‘용감한’ 시장이기도 했다.

우범지대 아파트서 기거
시카고 정계의 부정부패는 J 데일리의 장기집권에 의한 민주당 머신이 빚은 결과다. 다운타운의 루프 지역과 리틀 이태리, 그릭타운, 차이나타운이 포함되어 있는 시카고 제1지구의 시의원 프레드 로티를 비롯한 판사, 변호사, 주상원 의원 등은 서로 결탁해서 조직적인 부정부패로 악명이 높았다. 어느 정도 였는가 하면, 살인자가 재판을 매수하기도 하고, 뇌물수수, 금품강요, 각종 이권 개입, 공갈협박은 보통이었다. 알 카포네의 도시 다웠다. FBI와 연방검찰에 의해 1990년대 이들은 일망타진 된다. 제인 번은 적극적인 개혁파는 아니었다. 정치 마피아와 같은 시카고 머신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 제인 번은 머신정치와 맞서 시장이 되기 전 쿡카운티 검찰총장에 출마한 M 데일리를 지지하지 않았다.

83년 3파전 정치생명 끝나
제인 번의 정치생명은 1983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무너져 갔다. 1983년 임기가 끝난 제인 번은 재선을 노렸고, 전설적인 아버지의 후광을 입은 아들 M 데일리 쿡카운티 검찰총장도 시장으로 도전한다. 여기에 흑인 지역에서 신망이 두텁고 연방하원 6선 의원이며 폴리티컬 머신 출신인 흑인 해럴드 워싱턴이 시카고 시장에 출마했다. 따라서 사장후보를 뽑는 민주당 예비선거는 3파전이 되었다. 흑인이 반 이상 살고 있는 시카고에서 2명의 백인과 1명의 흑인이 싸운 결과는 백인표가 분산되는 바람에 해럴드 워싱턴이 시장에 당선됐다. 제10지구 에드워드 브도리악(Vrdolyak)과 14지구 버크(Burke)가 이끄는 백인 지배의 의회와 최초의 흑인 시장 워싱턴이 지배하는 행정부의 피 튀는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백인 지지 시의원이 29 명, 흑인지지 시의원이 21명이었다. 매사 사사건건 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새 시장은 의회와 전쟁을 치르며 고전을 면치 못했다. 나중에 히스패닉 의원이 흑인 쪽에 가담하는 등 판세가 25대 25가 되자, 할만해졌다. 트리뷴지는 당시를 “Troops regroup for new ‘council Wars’ battles”라고 표현했다.

항상 웃는 얼굴로 서민과 가까이 해 일반의 존경을 받던 워싱턴 시장은1987년 시장에 재선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시장실에서 점심메뉴로 맥더널드 빅맥을 먹다가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책상 앞에 쓰러져 깨어나지 못했다. 시장이 근무 중 순직한 셈이다. 제인 번에게는 다시 한번 기회가 온 것이다. 한인들과도 접촉하는 등 제인 번 스스로도 재기의 의지가 강했다. 하지만 재선거를 하지 않고 유진 소이어가 시장 대행을 하게 되었고, 1989년 실시된 선거는 제인 번의 컴백이 아니었다. 유권자들은 아들 M 데일리를 선택했다. J데일리에 이어 ‘데일리 왕국’이 다시 부활한 것이다. 그 후 리차드 M 데일리 시장은 내리 5선을 했다.
정치야말로 운명이고 타이밍 같다. 만약 1983년 민주당 시장 예비선거에서 흑백 3파전을 벌이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87년 흑인 시장이 급서하지 않았더라면, 제인 번의 정치행로는 달라졌을 것이다. 16일 장례식에는 평소 제인 번의 정적들도 많이 나와 남성 위주 사회에서 첫 여성 시장이 된 여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애도했다. 눈 때문에 시장이 된 그녀가 땅에 묻히던 날, 하늘에서는 또 눈이 펄펄 내렸다.

본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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