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프론티어의 기수 - 불멸의 케네디 신화

미국에는 대통령의 달이 두 달 있는 셈이다. 2월과 11월이다. 2월은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1732년 2월22일) 과 노예를 해방시킨 에이브러햄 링컨(1809년 2월 12일)이 탄생한 달이다. 그래서 정부는 2월의 세번 째 월요일을 ‘프레지던트 데이’라고 정하고 국경일로 기념한다. 11월은 링컨이 명연설인 ‘게티스버그 어드레스’(Gettysburg Address)를 남긴 달이고, 또 35대 대통령 존 F.케네디가 댈러스에서 암살 당한 (1963년11월22일) 달이다.

올해 미국은 특별히 링컨과 케네디의 추억에 젖어있다. 링컨은 남북 전쟁 중 펜실베니아 게티스버그에서 전사한 5만명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진혼제 연설에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정부는 이땅에서 사라지지 않도록---”이라는 민주주의의 정신을 가장 잘 표현한 연설을 했다. 150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케네디가 40대의 젊은나이에 큰 뜻을 더 펴지 못하고 아깝게 요절한 지가 50주년이 되었다. “동포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은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 묻지 마시오. 여러분이 여러분의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으시오. 세계시민 여러분, 우리들이 인간의 자유를 위해 합심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으십시요” 케네디 대통령의 신념과 철학은 이 취임사에 기록되어 지금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명연설이다.(연설문 작성자 테어도어 소렌슨 보좌관) 클린턴 대통령도, 반기문 유엔사무총장도 백악관서 케네디를 만나 사진 찍고 악수 한 후 영감을 얻어 그들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대선에 뛰어 들었던 게리 하트도 댄 케일도 케네디의 이미지를 닮으려고 노력했던 정치가들 이다. 케네디는 이렇게 정치가들의 멘토이며 만인의 우상이었다.

“ 사람을 압도하는 연설의 천재, 위대한 인간의 미, 하고자 마음먹는 것은 곧 실천하는 정신, 시와 아름다운 모든 것에 대한 사랑, 용감한 만큼이나 다감한 마음----” 케네디가 즐겨 읽던 책, 존 부켄이 쓴 ‘순례자의 길’의 한 구절 처럼 케네디를 상징적으로 잘 묘사한 글도 없을 것 같다.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뉴잉글랜드(마사츄세츠)의 차고 맑고 빛나는 공기가 주는 수려함을 좋아했으며, 잘 다듬어진 언어를 사랑했고, 결국 시의 권력, 권력의 시를 존중 했던 존 F. 케네디, 언젠가 그는 만약 더 많은 정치가가 시를 알고 더 많은 시인이 정치를 알면 세상은 더 살기 좋았을 거라고 확신 한다고 했다. 그는 문호 로버트 프로스트를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 시를 읊게 했는가 하면, 독일 백림 장벽 방문 시 “이히 빈 마인 베를리너”(나는 베를린 사람)이라고 외치기도 했다. 그는 정치적 이미지 보다 심미적 이며 종교적 차원의 이미지를 세계인에게 심어주고 갔다. 그가 미국에 이바지한 최대의 기여는 국민들에게 각자 자기들의 능력을 믿게 하는 지혜를 준 것이다. 모든 문제는 인간에 의해 해결 될 수 있다는 인간 의지의 깊은 신념을 심어 주기도 했다.

케네디는 자기 나라 ‘역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바보라고 누누이 말했다. 그의 백악관 재임 1천 일은 젊은 이들에게 용기와 신념을 심어 주었다. 젊은이들은 사명감에 불타 평화봉사단, 그린베레, 프리덤라이더로 세계를 누비던 시대였다. 그는 갈등을 화해로 이끌고, 변화와 희망을 이야기 했다. 60년대 미국의 큰 변화들, 즉 킹 목사의 자유의 행진, 여성해방운동, 환경보호운동, 이민법 개혁(한국의 대량 이민을가능케함), 메디케어 등등 물밀듯이 지나간 일련의 변화는 케네디 같은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메디케어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한 사회의 건강도는 그 사회가 연로자, 병약자, 가난한 자를 어떻게 대우하고 있느냐에 달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무릇 한 인물의 평가에는 긍정과 부정, 실상과 허상이 교차된다. 영웅과 우상화의 레토릭(수사학) 뒤에는 가차없는 허상의 비판도 만만찮다.

우선, 케네디는 양조장과 증권투자로 벼락부자가 된 집에서 태어난 플레이보이 난봉꾼 이다, 육체파 여배우로 마피아의 정부였던 마릴린 몬로와 불륜관계를 비롯, 수 많은 여자들과 놀아나고, 심지어 앨포드 라는 인턴을 제클린의 안방 침실에 까지 불러들여 섹스를 즐겼다는 것은 훗날 그녀의 회고록에 상세히 묘사된 바 있다. 후버급 3류 대통령에 불과한 사람이며 닉슨에게 겨우 이겨 뛰어난 업적도 없는 그가 신격화 되고 있는 현실을 혹평하는 측도 있다. 유명한 정치 평론가인 월터 리프만이나 애치슨 국무장관과 같은 사람도 케네디가 백악관을 맡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대중은 그가 이루지 못한 꿈과 약속 때문에 그에게 더 연민을 보내고 있다. 그는 살아서 보다 죽어서 더 영웅이 된 인물이다.

50년 전 11월 22일, 케네디의 사망 소식을 대중에게 처음 전한 CBS의 대기자 월터 크롱카이트의 바리톤 음성은 미국민을 망연자실케 했으며, 지금도 세계를 울리고 있다. 관공서는 조기를 달고, 이날을 ‘케네디 추모일’로 기념했다. 암살 현장인 댈러스 딜리 광장에 다시 인파가 모였다.

뉴프런티어의 기수로, 대중에겐 기쁨을, 가난한 자에게는 희망을, 여성들에게는 매력을 주던 존F 케네디는 50년 전이나 50년 후나 변함없이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

케네디가 간지 반세기, 세상은 많이 변했다. 유아였던 케럴라인은 일본 대사가 되어 왕실로 부터 극진한 우대를 받았다. 중국, EU, 러시아, 브라질, 인도 등의 급성장으로 ‘팍스아메리카나’(미국의 세계지배)는 쇠퇴하고 있으며 미국의 시대는 가고, ‘제2세계’가 오고 있다. 케네디 간지 50년, 오바마 대통령은 부인 미셸 여사와 클린턴 내외도 함께 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는 케네디 묘지를 찾아 참배를 했다. 그가 암살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없었을지도 모르는 사건, 이를테면 킹 목사와 케네디가의 연이은 암살, 워터게이트 사건, 월남전 패배, 9.11사태, 중동과 아프간 전쟁, 미국의 쇠퇴 등 역사의 상처 때문에 국민들은 케네디를 더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전국의 추모 열기는 미국의 영광을 다시 찾으려는 꿈의 발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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