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민주화운동 그 민족사적 의의

‘광주사태’가 일어난지 벌써 34년의 세월이 지났다. 한국에서는 정부가 주최한 반쪽 행사와, 5월 관련 시민단체가 주최한 행사가 따로 열렸다. 보훈처에서 ‘임을 향한 행진곡’을 못 부르게 했기 때문이다. 그 노래의 애잔한 사연은 알고 있으나, 보훈처가 왜 그 곡을 못 부르게 하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국회에서 결의한 대로 행진곡을 제창하겠다는데, 급조된 합창대 한테만 노래를 부르게 했다. 세월호 참사로 국민이 비통에 빠져있고, 그 어느 때보다 통합이 절실한 때 박 대통령은 곧 그만 둘 정홍원 총리를 보낼 것이 아니라, 작년처럼 직접 자신이 기념식에 참석했어야 했다. 정부의 슬로건은 “5.18 정신으로 국민화합 이룩하자” 였다. 기념식서 합창을 할 때 모두 기립했다. 정 총리는 앉아 있었다. 국민화합의 구호는 구호일 뿐 행동하고는 별도다.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 10년 동안 꾸준히 불려지던 노래가 이명박 정부 때부터 ‘금지곡’이 되었다. 정부의 태도는 역사인식에 대한 부족도 문제지만, 편협하고 째째하다는 생각이 든다. 노래를 부를 자유마저 주지 않는 현재 대한민국이 우리의 한심한 자화상 이다.

김상일 총영사 기념식 불참
시카고도 문제다. 워싱턴에서는 대사관과 총영사관, 한인회 , 호남향우회 공동 주최로 5.18 기념식을 가졌는데, 시카고에서는 호남향우회와 마당집이 주최하고 한인회는 뒷전에 후원 단체가 됐으며, 총영사관의 이름은 아예 빠졌다. 김상일 총영사는 식장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지난 1년 동안 150여 회 각종 행사에 참석 했다고 ‘자랑하는’ 총영사님께서는 특정 신문과 특정 단체하고는 잘 어울려 지방출장까지 다니면서, 시국이 어수선한 때 아무리 공사가 다망하기로서니 국가가 정한 기념일에 밑에 사람을 보내는 것은 옳지않은 처신 같다. 그 뿐만아니라 비젼을 지닌 자랑스러운 젊은이들이 어렵게 활동하는 봉사단체 모임에서 나는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시카고 동포사회의 일부 ‘갑’은 행복할 지 몰라도, 다수의 ‘을’은 행복하지 않다는 점을 이번 기회에 전하고 싶다.

본론으로 돌아가, 이렇게 무시당하고 아직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엉거주춤 서있는 광주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의미가 너무 퇴색되어 가슴 아프다, 그 아픔의 34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군부가 민간을 학살한 비극
광주 시민들은 왜 총을 들었나? 12.12 쿠데타로 박정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가 지연되자 정의감에 불타는 전국의 대학생들은 분연히 일어났다.광주에서는 13일부터 16일까지 전남대학교를 비롯, 9개 대학 학생들이 날마다 교내에 모여 민주화를 촉구하는 성토대회를 벌였다. 16일 밤 학생들은 질서정연하게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횃불시위를 마친 다음, 도청 앞 광장에 집결하여 5.16 화형식을 가진 후 17일 18일 주말을 쉬고 19일부터 정상적인 수업에 들어가 정부의 성의있는 답변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정부는 난데없이 17일 야간에 계엄령을 확대 선포하고 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졌다.

시민들은 정부의 처사에 의아해했다. 18일 아침엔 이미 각 학교에 공수부대가 투입되고 M16에 대검을 꽂고 학생들을 향해 돌격을 감행했다. 오후 4시경 공수부대와 학생시위대는 공용터미널에서 처음으로 부딪쳤다. 군인들은 맨주먹의 학생들을 무차별 난타했다. 많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만류하는 시민까지 짐승처럼 구타했다. 이 참담한 사실은 입에서 입으로 전시민에게 전달됐다.
공포의 하룻밤을 지새우고 19일이 밝았다. 공수부대는 30여대의 트럭에 분승하여 도청 앞과 금남로 사거리에 나타나 본격적인 무력진압에 나섰다. 그들의 총격으로 병원은 사상자가 만원을 이루었다. 공수대원들은 아무 집에나 토벌군 처럼 들어가 젊은이들을 색출, 불문곡직하고 끌어내어 구타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은 자구책을 강구하지않을 수 없었다. 일부 청년들은 경찰서와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하여 소총, 기관총과 실탄, 수류탄을 ‘약탈’했다. 광주는 삽시간에 시가전에 돌입한 전쟁터가 되었다. 이렇게 19일 20일이 지나고 21일 시민군이 도청을 접수하자 군은 부대별로 시외곽 요충지대로 철수했다.

수습위 요구 받아들였어야
사회 각계의 지도급 인사 15명은 ‘5.18사태 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정부에 7개항의 결의를 전달했다. 더 이상 유혈을 흘려서는 안 된다는 순수한 어른들의 충정이었다. 즉, 1.사태수습 전에 군을 투입하지 말 것, 2.연행자 전원을 석방할 것, 3.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할 것. 4.사후 보복을 금할 것, 5.책임을 면제해 줄 것, 6.사망자에 대하여 보상해 줄 것, 7.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장해제를 하겠다. 그런데 수습위원들의 요구는 아쉽게도 묵살됐다. 지도급 인사들이 비폭력으로 탱크 앞에 장렬한 죽음의 행진을 하자, 계엄군은 일시 후퇴를 했다.
소강상태에서 작전 시기를 노리던 계엄군은 드디어 27일 새벽 2시 극비리에 공격을 개시, 다시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시내를 완전 장악했다.

그렇다, 광주는 이처럼 끔찍한 비극이었다. 60년 4.19이후 20년 만에 동족이 동족을 학살한 민족사적 최대 비극의 하나다. 신군부에 광주는 거짓이었다.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하고도 “지방색을 내세운 유언비어 때문에 난동이 일어났다” “북한 간첩들의 소행이다”라고 역사의 진실을 왜곡했다. 광주는 아픔이다. 백년의 한으로 응어리진 민족사의 아픔이다. 학살당한 숫자 조차 모른다. 200명에서 2000명을 오르 내릴 정도로 끔찍한 아픔이다.

광주의 아픔 현재도 진행중
이 비극, 이 거짓, 이 아픔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2014년 세월호 참사는 동떨어진 사건이 아니다. 1980년 찬란한 5월의 하늘아래 어른들 잘못으로 매맞아 죽고 총에 맞아 죽은 억울한 영혼, 죄 라면 민주주의를 외친 죄 밖에 없는 젊은 생명, 해마다 그날이 오면 수의조차 입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난 불행한 세대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광주는 더 이상 호남의 광주가 아니다. 세계 역사 속의 광주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든 ‘합창’하든 도도한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는 없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 남녘 땅 황토와 거센 바닷 바람이 빚어낸 5월의 선지자여! 광주의 비극과 패배와 좌절을 조국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앞당기는 부활의 십자가로 삼는다면, 그 희생은 환희와 승리의 값진 유산이 될 것이다.

본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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