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양김시대’

민주화 투쟁과 부정부패 척결
YS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지인으로부터 전화로 처음 듣고, ‘’격동의 한 시대가 다 지나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화 투쟁과 부패 척결에 앞장섰던 김영삼 전대통령이 22일 세상을 떠났다. 6년 전 먼저 간 DJ와 함께 군부 독재와 맞서 치열하게 싸우면서, 또 대통령 직을 수행하면서 한국현대사를 이끌던 YS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제 ‘양김시대’는 종막을 고했다.

영원한 맞수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쟁하면서, 거산(큰산)과 후광 김대중은 남도 영남과 호남이 낳은 양대산맥이었다.

YS의 민주화 투쟁은 장렬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반대하다 초산테러를 당했다. 1979년은 한국 정치사의 극적인 한 해였다. 그 해 5월 YS는 신민당 총재직에 복귀했다. 8월에는 빛도 없고 이름도 없는 산업화의 꽃다운 역군, YH여공들을 신민당 당사에서 보호한 YS를 박 정권은 탄압했다. 박정희 정권의 말로를 재촉하는 사건은, YS의 뉴욕타임스 기자와의 인터뷰가 불을 당겼다. YS는 기자에게 민중혁명으로 무너진 이란의 독재자 팔레비를 언급하며 박정희를 비난했다. 미국 정부는 박정희 정권 지원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서슬이 시퍼런 유신시대 긴급조치하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이런일로 해서 YS는 신민당 총재 직무정지와 함께 국회의원직 까지 제명을 당했다. 김영삼 총재는 의사당을 쫓겨나면서 의사당 인근 순교자의 성지인 절두산을 바라보면서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나는 오늘 죽어도 영원히 살 것이다” 라는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YS는 평소 “민주주의는 피의 강을 건너 죽음의 산을 넘어 쟁취한다”는 케네디 대통령과 같은 웅변가였다.

장택상 총리 비서를 하다가 25살에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된후 내리 9선을 한 김영삼의 고향, 부산이 가만이 있지 않았다. 10월 15일 부산대학이 시국선언을 했다. 참다 참다 독재의 횡포가 극에 달하자 정의감에 불타는 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이어서 반정부시위가 부산과 마산으로 번졌다. 이른바 ‘부마사태’를 불러왔다. 청와대 경호실장 차지철은 수 만명이 죽더라도 데모대를 강경 진압하자는 주장을 폈고, 김재규 정보부장은 이를 반대하자 권력 내부의 갈등이 폭발, 결국은 10월 26일 김재규에 의해 박정희와 차지철은 암살을 당했다. 유신 독재는 이렇게 비참하게 끝났다. 그러나 민주화의 염원을 간직한 서울의 봄은 잠시, 한국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광주를 피로 물들게하고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1983년 5월 YS는 가택연금된 후 정치규제 조치에 항의, 23일 동안 죽음의 단식투쟁을 했다. 동지이자 영원한 맞수인 DJ가 미국 망명에서 귀국한 1985년, YS는 그와 힘을 합쳐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여 12대 총선에서 여소야대의 승리 구도를 만들었다. 이들은 직선제개헌운동을 전개,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주도, 전두환 정권의 항복을 받아낸다. 그 해 치러진 대선에서 ‘양김’은 단일화에 실패하고 노태우에게 대통령 자리를 빼았겨, 한국의 민주화는 5년 이상 지체하게 된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1990년 1월, 나는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초청을 받아, 수유리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열린 해외동포 초청 통일문제 세미나에 참석했다. 이틀간 숙식을 같이한 모임에서 나는 YS와 식탁에 마주 앉아 김치국 조찬을 맛있게 먹기도 하고, 세미나가 끝난 후 그와 단독 인터뷰를 갖기도 했다. 특별히 합당을 하려면 DJ 당과 합당을 해야지, 적이었던 여당과 더 나아가 유신본당과 3당 합당을 하는 것은 순리에 맞지 않는다는 나의 반론에 대해, YS는 “정치는 순리만 따를 수 없다. 그럴려면 산에들어가 고사리를 먹고 살아야한다. ‘김대중’과는 도저히 안된다” 군부세력과 손잡은 것은 ‘야합’이 아니냐는질문에 대해 그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3당 합당은 큰 정치를 하자는 ‘구국의 결단’이다” 라고 말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린시절부터 책상위 머리맡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고 써 붙여놓고, 동물적이라고 할 만큼 뛰어난 정치감각의 소유자인 YS는 일찌기 ‘40대 기수론’을 내 세우고 드디어 93년 2월 대통령에 취임, 최정상의 권력을 잡았다. YS는 95년 7월 클린턴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워싱턴 한국전 참전조형물 제막식에 참석한 길에 시카고를 방문한 최초의 한국 대통령이다. 93년 대통령이 되기 이전, 80년대에도 시카고를 2번 방문했다. 한번은 매더 하이스쿨에서 고이재현 박사, 박장열박사, 김양덕, 이응곤, 이병헌, 장지원, 조광동이 주축이된 ‘민통’(회장 고 김종웅) 주최로 한국의 민주회복을 위한 강연을 했다. 이들 시카고 민주인사들은 DJ나 YS나 지방색을 떠나 똑같이 동등하게 지원했다. 그 때도 나는 YS와 스코키힐튼호텔 (현재 더블트리호텔)에서 김덕룡, 최기선 비서와 함께 조찬을 하고 이어서 그의 호텔방에 올라가 단독인터뷰를 했다.

또 한 번은 워싱턴을 가는 길에 공항에서 곽노순 목사와 조광동, 김양덕씨 등 민주인사들의 영접을 받았다. 그 때 우리 아들이 화동으로 차출돼 YS와 찍은 사진이 지금도 그의 방에 걸려있다. 후에 그 아이는 글렌부룩 사우스 하이스쿨의 학생회장이 되었는데, 그 때 김 대통령의 정기를 받아 당선되었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3당 합당은 YS가 총선민의를 뒤엎었다는 비판과 함께 문민정부 출범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가 엇 갈린다. ‘구국의 결단’은 명분이며, 실제로는 12대 총선에서 여소야대의 구도 속에 제2 야당으로 전락한 YS 가 대통령이되기 위한 ‘야합’의 승부수 였다는 것이 일부 정치 평론가들의 분석이다. 평가는 후세 역사에 맡길 일이다. 3당 합당이 문민정부의 탄생을 가져왔고, 결국은 DJ 보다 먼저 대통령이된 YS는 개혁과 개방에 총력을 기우려 ‘명예혁명’에 성공한다. 군부 사조직인 하나회를 숙청하고, 쿠데타와 부정축제의 죄를 물어 전두환, 노태우를 구속하고 형무소로 보냈다. 고위 공무원의 재산을 공개하게하고, 금융실명제와 부동산 실명제, 지방자치제를 실시했다. 경호실장을 민간인으로 대체했다. 청와대에 금고와 노래방을 없앳다. 모두 잘한 일이다.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전개, 일제 잔재인 광화문을 헐어버렸다.

국가부도IMF 대통령 최대 실책
그러나 경제에 약했던 대통령은 임기말인 1997년 한보와 기아자동차의 부도 등 적색경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화 추진위 구성,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 )조기 가입 등 세계화와 개방을 서두르다 준비 없이 금융시장을 개방하는 바람에 국가부도로 구제금융을 받게됐다. YS는 ‘IMF대통령’ 이라는 재임 중 최대의 실책을 범하게 된다. 거기에다 친인척 비리에 둘째 아들 김현철은 ‘소통령’화와 조세포탈 등 부정부채로 실형을 살았다. ‘변화와 개혁’을 선포한 취임사 발표 이후 90%의 국민지지도는 간곳 없고, 임기말 지지도는 6%로 떨어졌다.

‘칼국수’의 서민 대통령 이미지도,
‘대도무문’의 트레이드마크도 땅바닥에 떨어진 정치무상이 아닐수 없다.
“건강은 빌릴수 없지만, ‘머리’는 빌릴수 있다”는 지론을 갖고, ‘인사가 만사’라며 과감한 인재 발탁의 개방적 탕평책을 썼으나, 정작 본인의 ‘머리’도 조깅(뛰어야)을 해야 한다는 훈련은 등한시 했다.

마지막 남긴말 통합과 화합
YS는 민주주의를 세우기 위한 투사이기는 했으나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제왕적 개인 리더십, 국회의원 공천제, 가신체제 온존, 계파정치. 지역주의 심화, 권위주의 잔재 라는 정치적 후진성의 유산을 남겼다. 정치인으로 치열하게 살다간 그가 가족과 국민에게 마지막 남긴 말은 ‘통합’과 ‘화합’이었다. 후세 정치인들이 명심해야 할 교훈이다. 그의 공(잘한점)은 인정하고 배워야하며, 과(잘못한점)는 반면교사로 삼아야할 것이다.
국민의 사랑을 받은 김영삼 대통령은 26일 만인의 애도속에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는 손을 꽉 잡고 상대방 눈을 쳐다보며 악수를 잘했던 대통령으로 유명하다. 우리 집사람이 YS와 악수를 하면서 느꼈다는 그의 ‘따듯하고 부드러운 손’도 한 줌 흙으로 돌아갔다. 우리시대 참 큰 어르신, 생전의 개인적인 나와의 인연도 고이 간직하련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본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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