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만에 잠깐 들른 한국


한국에서 약속을 할 때 보통 지하철 근처 찻집이나 지하철 몇 번 출구에서 만나자고 했습니다. 서울 지리에 얼떨떨해진 저 같은 촌사람에게는 편리한 약속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커피샵이나 빵집 이름이 한국어가 아니라 외국어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어느 친구가 3호선 안국역 출구 근처에 있는 빵집에서 만나자고 하는데 이름이 무척 생소했습니다. 얼른 들으니 ‘아만디’라고 하는 것 같아 “뭐 아만디?”하고 다시 확인했더니 그렇다고 했습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출구를 잘못 택해 아만디 빵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힐끔 쳐다 보면서 대꾸도 안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여럿이었습니다.

한국이 아열대 기후가 되었다고 말들할 만큼 섭씨 35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에서 계속 길을 묻는 제 등어리에 땀이 흠뻑 흘렀습니다. 마침 고등학생처럼 보이는 소녀가 “아몬디에 말씀하시는 거 아녜요?” 하기에 “뭐 그런 이름 비슷해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소녀 덕분으로 찾은 빵집은 ‘Amandier’, 소녀 말대로 ‘아몬디에’ 였습니다. 자리도 앉기 전에 기다리고 있는 친구에게 “빵집 이름 아몬디에가 무슨 뜻이냐?” 하고 불평 조로 물었더니 빙긋이 웃으면서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하고 대답했습니다. 외국어 이름이 범람하는 한국에서 이런 질문은 질문도 안 되는 질문이었습니다.

오후 낮 시간 아몬디에 빵집에 손님은 대부분 젊은이들과 중년 아주머니들이고 나이든 남성 노인은 우리 둘뿐이었습니다. 두리번거리는 저에게 한국은 할 일없는 아줌마들이 저렇게 몰려다니며 노닥거린다고 친구는 웃었습니다.

빵을 시키고 돈을 지불한 친구에게 종업원이 “화장실 번호는 영수증 아래 있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빵을 사는데 느닷없이 화장실이 나와서 저는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고 “네?”하고 되물었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똑같은 말을 아무런 감정없이 되풀이했습니다. “화장실 번호는 영수증 아래있습니다.” 그래도 못 알아듣고 눈을 멀뚱거리는 저에게 친구는 다시 싱긋 웃으면서 화장실에 가려면 코드 번호를 눌러야 하는데 그 번호를 말하는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8년만에 잠깐 들른 한국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지만 더욱 화려하고 첨단화되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인터넷 신문으로 접했던 것 보다 한국은 전보다 훨씬 안정되고 질서가 잡혀있었습니다. 건널목에서 정지 신호가 있으면 차가 없는데도 길을 건너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도심지도 아니고 한가한 동네 신호등에서도 그랬습니다. 신호등을 무시하고 길을 건너는 사람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미국 대도시 문화에 익숙한 저에게 교통 신호를 잘 지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눈에 설었습니다. 동생이 사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가는데 쓰레기 분리 수거가 잘 돼 있는 것도 달라진 모습이었습니다.

지하철은 조용했고, 사람들이 많은 데서 휴대전화를 큰소리로 하는 사람들도 드물었습니다. 아무 데서나 왁자지껄 떠들면서 셀폰을 사용하는 지금의 미국은 20년 전쯤의 한국을 닮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하철에서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아이폰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책을 읽는 사람은 보질 못했고 신문을 읽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가끔씩 지하철 기내 방송에는 옆 사람의 불편을 주지 않기위해 휴대 전화는 진동으로 해달라는 안내 방송이 나왔습니다. 한국의 지하철은 안전을 위해 덧문까지 설치해서 미관상으로도 아주 고급스러워 보였고 강원도 춘천까지 연결될 만큼 편리했습니다. 저는 방문객이라 70세가 넘었지만 ‘지공거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지공거사’는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어딘가 냉소적이고 비하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공’은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말의 약자라는데 ‘거사’는 무슨 말의 줄임말일까 하는 생각이 지나갔습니다. 거사는 불교 용어로 도를 닦는 신심 많은 사람이란 뜻 같은데 원래 약자를 만든 사람 심중에 ‘거사’가 “거지같은 사람”의 줄임말을 염두에 두었으나 너무나 모멸적이고 폭발적인 뜻이라 그냥 ‘거사’로 생략한 것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셜 시큐어리티 같은 사회보장 제도가 없는 한국에서 지하철이라도 공짜로 타게 하는 것은 경로 대접이라고 하겠지만 65세가 넘으면 일률적으로 무료 승차제를 실시하는 것은 지나친 무리이고 너무 획일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든 학생들에게 일률적으로 공짜 점심을 제공하는 정책과 상통했습니다. 지하철 요금을 낼 수 있을 만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연장자는 당연히 제외해야하고 무료 보다도 할인제를 하고, 극빈자에게만 무료로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인데 획일적으로 무료제를 시행하는 것은 국가적 낭비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하철이 공짜가 되면서 노인들이 불필요한 승차를 자주하게 될 것이고, 공짜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국민 부담도 커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젊은 층은 노인들의 무료 승차의 남용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노인들은 공짜를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면서 위화감과 괴리감이 커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하철을 타면서 자리에 앉으려고 두리번거리지 않기로 마음 먹었고, 가능하면 젊은이들이 앉아있는 좌석 앞에 서있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노인들이 전철을 타자 마자 자리부터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천박하게 보였고 젊은 사람들 앞에 서 있으면 “이 노인은 왜 내 앞에 서서 나를 부담스럽게 하나” 하는 생각을 할 것 같았습니다. 늙었기 때문에 자리에 앉아서 가야 한다는 생각을 너무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노인들 모습에는 늙음이 가지는 우아함과 너그러움, 자존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한 번은 경로석에 빈 자리가 있어서 앉았습니다. 갑자기 옆에 있던 노인이 “다리 내리고 앉아요”하고 퉁명스런 어투로 말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고 얼떨결에 “네?”하고 반문을 하자 “다리 꼬고 앉지 말란 말이오”하고 꾸짖듯 말했습니다. 저는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꼬고 앉은 다리를 내리고 오므려 붙이고 앉았지만 속으로 부아가 치밀었습니다. 저도 머리가 허연 노인인데 열 살쯤 더 보이는 노인네가 핀잔을 주듯 말하는 것이 불쾌했습니다. 지적하는 방법이 무례하고 위압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거나 내 앞에 다른 사람이 서 있었으면 다리를 꼬고 앉는 것이 상대에게 불편을 줄 수도 있겠지만 전철 안은 한산했고 빈 자리까지 있었습니다. 야단을 맞은 뒤 둘러보니 지하철에 다리를 꼬고 앉은 사람은 보이질 않았습니다. 끝부분에 허연 헝겊을 싸맨 지팡이를 들고 때가 꼬기 꼬기 묻은 작은 손가방에 낡은 검은 테 안경을 쓰고 때에 전 잠바를 입은 노인네를 저는 못마땅한 눈으로 잠시 쳐다보면서 이 노인네는 무슨 세도로 이렇게 당당하게 같은 노인인 나를 야단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젊은이들을 훈계하면 노인들이 존경을 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을 방문하면 아무리 바빠도 책방을 둘러보는 습관대로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를 들렀습니다. 많이 달라졌습니다.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리고 책방 구석구석에 앉아서 책을 읽던 학생들 모습이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교보문고는 바닥을 고급스러워 보이는 나무로 깔고 분위기가 아주 묵직하고 격조있게 개조됐으나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책 포장은 세련되고 고급스러웠으나 제목이 너무 가볍게 느껴지는 것이 많았습니다. 언어 문화가 달라지고 있었습니다.

낮에 온종일 사람들을 만나고 밤늦게 어느 후배가 아파트로 차를 태워주는데 아파트 이름이 정확하게 생각나질 않았습니다. 비슷하게 생각나는 이름을 말했으나 아이폰 지도에 뜨질 않고, 차를 세우고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밤이 늦었지만 전화를 하려고 하는데 마침 매제가 보내 준 아파트 주소가 텍스트 메시지에 있어서 집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빵집 커피집 이름은 그렇다고 해도 왜 아파트 이름까지 외국어로 도배질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파트로 걸어 들어가는데 언젠가 미국에서 여행 중이던 한국 젊은이가 크레딧 카드를 분실해서 전화로 도와주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카드 회사 담당자가 여행객에게 크레딧 카드 주소를 물었으나 이 젊은이는 자기 집 아파트의 영어 스펠링을 몰랐습니다. 미국인도 저도 처음 듣는 요상한 아파트 이름을 제가 적당히 작문했었습니다. 국적 불명에 번지수도 틀린 외국어가 아파트까지 범람하는 모국의 변화는 국민의식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상징 같았습니다. 언어 애국심의 상실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 의식에서 긍지가 떠나고, 문화에서 영혼이 떠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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